8월 5일~7일, 2박3일간 정동진 독립영화제 기간 동안 스튜디오 '지금이'에서 엠티를 다녀왔습니다.^^
"와~!! 바다다 바다!!"
부제 - 큰형님과 부하들
부제 - 큰누님과 부하들;;
저녁엔 '정동진 독립영화제'에서 박 감독님의 '낙타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 영화들을 감상하고
낮에는 해변에서 여름을 만끽하며 물놀이를 즐겼습니다.
부제 - 큰형님과 부하들
부제 - 큰누님과 부하들;;
저녁엔 '정동진 독립영화제'에서 박 감독님의 '낙타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 영화들을 감상하고
낮에는 해변에서 여름을 만끽하며 물놀이를 즐겼습니다.
트란안 홍의 상실의 시대를 보았다. 예고 편을 보며 이미 소설과 비슷할 거라는 기대는 접었지만, 그렇게 잘 생긴 와타나베라니.....나의 레이는 그렇지 않아!
이게 와타나베. 어디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책만 읽게 생겼냐구!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평범해야 한다. 평범하면서도 매력 있는. 그렇게 긴 속눈섭의 조각 미남이라니. 게다고 옷이 더 문제. 완벽한 댄디 보이!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젊은 모습 같은 것을 기대했건만.....
나는 이런 걸 원했다오. 요기서 약간 잘생기게 변주 정도랄까..........
게다가 미도리...........
미도리만은.......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미도리는 홧김에 밀어버린 아주짧은 머리. 병아리 같은 이미지.
사실 소설의 미도리는 거의 이런 이미지다. 중경삼림에 왕정문 같은.
결과적으로 영화는 일본어 더빙이 된 베트남 영화같다. 가옥 구조라든지, 거리가 나오지 않는 도쿄라든지.
모든 배우가 일본 배우 임에도 그런 느낌이 난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로 막연하게 나마 시대의 공기 같은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영화에는 68년의 도쿄는 없다. 아무리 봐도 베트남이나 대만 그런 곳으 느낌.
그래도 이야기 전개는 소설과 같아서 한참 상실의 시대를 읽던 대학때가 생각나서 좋았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때도 불행하기는 했지만 왠지 미래에 내가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은 희망이 있어서 좋았었는데.
지나간 사랑의 아련한 느낌과 다가올 사랑의 막연한 기대같은 것이 있어서 좋았는데.
쳇.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뽀야와 지우개 연인
남들이 어떻게 하건 자기는 자신만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장편은 자본에 요구에 굴복 할 수밖에 없고 단편이라도 상을 받는 작품을 보면 부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잘 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또 다른 건 모르겠다는 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을 좋아한다. 막상 나 자신은 잘 그렇게 안 되지만 말이다.
‘솔직하게 나의 취향을 알려 주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 싶다. 첫째는 뽀야,
뽀야를 처음 본 것 인디애니페스트라는 영화제였는데 처음에는 대충 만든 듯 한 애니메이션과 유치한 내용에 ‘뻔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봤지만 보는 중간부터는 푹 빠져 들고 말았다.
뽀야는 사춘기에 접어든 토끼소녀이다. 밝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혼자 자취를 하며 취미는 쇼핑과 게임. 그리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전부인 인생을 살고 있다. 이런 뽀야 앞에 초식동물 차별주의자인 페르시안 고양이 르페가 나타난다.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토끼야’라고 부르는 루페 때문에 고민하는 뽀야.
한편 뽀야의 단짝 친구 고양이 ‘얌차’는 엄마 없이 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남자 친구가 생기게 되면서 동생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노력해도 좋아지지 않는 르페와의 관계.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단짝친구인 얌차의 임신 사실을 알고 뽀야는 두 배의 충격을 받고 만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동화, 대충 그린 배경.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친구와의 갈등, 가족의 문제, 이성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또 토끼와 고양이가 주인공인 동화적인 측면에서 ‘남자 친구와 관계에서 임신하게 된 친구’라는 현실적인 면까지를 두루 갖춘 성장영화이다. 그리고 주인공 뽀야가 가진 순수하면서 밝은 에너지는 보는 사람을 결국은 미소 짓게 만든다.
작화에서 배경작업 성우 녹음, 심지어 마지막에 나오는 주제가 작사 작곡까지 모든 역할을 해낸 최도영 감독은 특히 성우 쪽에는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혼자서 5-6명을 연기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모든 캐릭터를 살리고 있다.
이 작품은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의 지원을 받아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파일럿 1화 분량이 제작 되고 있는데 TV시리즈로 방송으로 볼 수 있다면 분명 재미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작품은 지우개 연인
이 작품은 원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인 박지연 감독이 만든 단편인데 박지연 감독은 원래 EBS에서 방영했던 애니메이션 ‘레카’와 ‘흑장미 부인의 문방구’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이다. 사실 그녀는 그 전에 한 번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본적이 없다.
이 작품은 문화센터 워크숍에서 만들어진 작품인데 그 워크숍의 담당 강사는 나였다.
그녀는 ‘버리는 것은 없다’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녀는 내가 ‘작화는 이런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라고 테스트로 그려 준 컷 까지 모두 화면에 넣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친구, 후배 그리고 엄마와 자신의 중학교 제자들까지 한 장씩 그리게 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품은 종종 채색이 덜된 부분이 보이고 심지어는 화면의 픽셀이 깨진 부분도 있다. 감독이 포토샵을 잘 모르는데다가 픽셀이 깨진 것도 괜찮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이 되고 나서 작품을 보니.........너무 재미있었다.
두 연인이 대화하는 내용을 따라가는 애니메이션인데 두 사람의 대화는 옛날 방화에서 나오는 그것이다. 그러니까 ‘날 잡아 봐요~’해변에서 뛰어가는 두 남녀 분위기.
들장미 소녀 캔디 같은 분위기의 화면에 옛날 방화의 말투의 성우녹음의 간극이 큰 재미를 준다. 신선했다. 그리고 상영 할 때마다 관객들도 무척 좋아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러한 제작 방식과 완성된 작품이 주는 재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만들면서 재미를 느끼고 어찌되었던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작품.
마이클 두독 비트의 ‘아버지와 딸’도 훌륭하고 픽사의 단편들도 훌륭하고 앙시나 자그레브의 대상 작품들도 훌륭하지만 그것만 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으면 왠지 올림픽 금메달을 따야하는 육상선수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린다.
언제부터였을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많은 준비가 필요해 진 것이......... 이런 작품들을 보면 준비가 없어도 되며 즐겁게 연주하는 거리 공연 같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들이 엄숙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즐겁고, 만든 사람 스스로를 위로해 주기를 바란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고흐의 작품을 만드는 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분석적이며 노력에 의한 것이다.
결국 예술적 재능이라는 것은 그런 노력을 지속적으로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요즘 도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만 있기 때문에
고흐의 편지의 어떤 부분을 읽다가 정신이 멍해 졌다.
나 자신이 고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정말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 쓸모있고 생산적인 사람이.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중략)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게으름 뱅이도 있단다.
어쩔 수 없이 게으름 뱅이가 된 사람,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엄청난 욕구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무언가에 갇힌 듯한 이 사람에게는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부족하단다.
불가피한 상황들이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늘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지.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느낀단다.
'그래도 난 무언가에 쓸모가 있으며, 나의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어!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어떻게 하면 쓸모있는 사람이 될까?
무엇을 할 수 있지? 내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대체 그게 뭘까?'
이런 사람은 전혀 다른 유형의 게으름 뱅이야. 나를 이들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해도 좋아.
봄에 새장에 갇힌 새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알고 있단다.
그런데 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분명히 느끼면서도 속수무책인거야.
그게 무얼까? 좀처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어.
"다른 새들은 둥지를 짓고 새끼를 낳아서 기르지."
그는 혼자 이렇게 말하며 새장의 창살에 머리를 부딪는단다.
하지만 새장은 그대로 있고, 새는 슬픔으로 미쳐버릴 것 만 같지.
"저 놈은 게으름 뱅이야." 라고, 지나가는 새가 내뱉는 단다.
"놀고 먹는 놈이지." 이런 말을 듣고도 새장에 갇힌 새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
건강은 양호하며 햇빛을 받으면 명랑한 기분에 젖기도 해.
그러다가 철새가 이동하는 계절이 오면 갑작스레 우울증이 찾아든단다.
"하지만 부족한게 없는 새잖아." 라고, 새장 속의 새를 돌보는 아이들은 말하지.
그렇지만 그는 폭풍우 가득 실은 하늘을 내다보며 내면에서 솟구치는 운명에 대해 저항을 느낄 따름이야.
"난 새장 안에 있다. 새장 안에 있어. 그러니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 바보들아!
난 필요한 모든 걸 가졌어! 아, 제발 내게 자유를 다오. 다른 새들처럼 말이야."
게으른 그 남자는 이 게으른 새와 비슷해.
하지만 해방이, 궁극적인 해방이 있음을 잘 안단다.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더럽혀진 명성과 장애물, 주변상황, 불운, 이 모두가 사람을 죄수로 만들지.
무엇이 우리를 유폐하고 산 채로 매장하는지 늘 알 수 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창살이나 새장, 벽의 존재를 느낄 수는 있단다.
이 모두가 상상이며 환상일까? 그렇지는 않을거야.
나 자신에게 물어본단다. 맙소사,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까? 영원히 계속될까?
이 감옥을 사라지게 하는 건 뭘까? 그건 바로 사랑이야.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사랑한다면, 그 숭고한 힘과 강력한 마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 수 있겠지.
그런게 없는 사람은 생명을 잃은 채 살아가는 거야.
연민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에 삶이 다시 피어난단다.
--------------------------------------------------
여기까지가 고흐의 글이다.
다른 새들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지.........
내 친한 친구와의 가벼운 친밀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감. 그리고 반짝이던 날들의 기억.
2009년 반짝이던 날들의 기억이 발표되면서 김준 감독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이 마무리 되었다. 나는 이것을 공간 삼부작이라고 부르는데 말하자면 공간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라서 그렇다.
한국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초창기 1990년도에서 2000년도 초반까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지닌 단편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감독들이 80년대의 아이들로서, 첨예한 정치의 시대에 대학을 다니고 그 감수성을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개인의 감성을 중요시 하는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주인공의 감정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풀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김준의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흐름에서도 아주 특별한데, 바로 공간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상징적인 공간이 아닌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풍경들이다.
‘내 친한 친구와의 가벼운 친밀감’에서는 카페에서 친구와 앉아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도 카페의 풍경도 사라지며 선과 면의 주변으로 변해버린다.
내 친한 친구와의 가벼운 친밀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주인공을 둘러싼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갑자기 혼자가 되어 주변이 몽환적으로 변하는 그런 느낌이랑 비슷하다고 할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감’에서 카메라의 유려한 흐름은 왠지 꿈결 같다.
한장 한장 손으로 그려진 카메라 움직임를 통해서 우리는 아파트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몽유병을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필로 그려진 따듯한 흑백의 이미지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3D로 만들어진 입체가 아니지만
내 친한 친구와의 가벼운 친밀감-카페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간감-아파트
반짝이던 날들의 기억-거리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공간들은 감독이 주로 생활하는 공간들이다.
한동안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유독 주변의 풍경에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안 그런 작품도 많이 있지만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환타지의 세계나 상상의 세계를 다루는 작품이 더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고 우리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첫 출발이 주변부터라는 것,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내안으로 걸어 들어가지만 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작업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방식이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일 수도 있지만 김준의 그 것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조심스럽게 공유하는 느낌이다.
김준은 조용하고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곳에는 자연스럽게 동시대의 서울의 풍경과 도시와 사람들이 나타난다.
김준이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조금 더 인물이 중심인 작품이라는데.......아마 올해 안에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2년을 장편 애니메이션을 기획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중편 '무림일검의 사생활'이 끝나고 영화사와 공동제작의 형식으로 혹시나 상업영화 규모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획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2년 동안 경험해 보니 막연한 기대로는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업자본은 이미 떠나가 버렸다. 2007년 한국영화산업이 -60%는 라는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하였고 투자가 얼어붇기 시작했으며 많은 데뷔를 기다리는 젊은 감독들의 프로젝트가 영화사의 차기작 리스트에서 사라졌다.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빠서 큰 영화사 주도의 애니메이션 기획도 잘 투자를 못 받는 상황이다.
결국 2007년 천년여우 여우비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는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이 개봉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애니메이션은 망할 것이 뻔한데 왜 투자하냐는 투자회사 관계자도 만나본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이 투자가 더 안되는 이유는 유명 배우도 없고 브랜드 있는 감독도, 회사도 없기 때문이다. 임수정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봉준호가 감독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픽사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지난 10년동안 성공한 작품도 없다면 내가 투자자라도 주저 할 것 같긴 하다.
이러한 이유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하고 현장의 감독들은 본의 아니게 명랑해전을 치루어야 하는 이순신 장군 같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해볼 만큼 해봤는데 다른 일을 하는게 낫지 않아?"
"차라리 먼저 만화로 만들어 보는 거이 어때?"
"너도 실사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주변에서 그렇게들 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어째든 '문학은 죽었다'와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같이 아주 오래된 말이지만 '한국에서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렇게 어렵다면 단편을 계속 만들면 안될까? 음........안될 것 같다. 물론 긴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다른 이유로, 단편만 계속 만들어서는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할 수가 없다는 이유가 있다.
현실적으로 유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중심으로 상영되는 단편은 역시 많은 관객과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작품을 재 생산해 내는 수익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단편 작가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시간 강사가 되든지 가계를 차리든지 다른 수익원이 필요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TV시리즈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TV애니메이션은 4~5세 이상을 타킷으로 한 작품은 제작이 힘들다. 주로 방송에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시간은 오후 4시인데 그 시간에는 청소년들은 집에서 TV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상의 아이들은 학원에 가있거나 뭔가를 하고 있다. 연령이 높은 애니메이션은 역시 시장이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기본적으로 아이들이 많은 보는 것은 사실이다. 나도 아이들과 같이 봐도 문제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성인의 문화적 욕구까지 충족시키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나는 내가 느꼈던 어떤 느낌들을 동시대에 사람들과 공유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독립애니메이션 되어 버렸다.
이제는 '한 겨울의 산딸기' 든 '드래곤의 하트'든 필요하다면 뭐라도 구해와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과도한 임무를 부여받고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감독들이 유일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이다. 퀄리티나 개봉관의 숫자, 관객의 숫자는 둘째 문제이다. 어떻게든 만들어서 빨리 극장에 걸어야 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상업적인 투자를 받으면 좋지만 그것만을 바라보고 몇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보폭이 작아도 한 걸음씩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니, 그게 정말 최악이다.